아임쏘리

 

 

유정은 디카프리오를 닮은 그가 너무 맘에 들었다. 미국인과 미

팅을 하다니. 세상 살다보니 별 희한한 미팅을 다 해본다. 오늘

따라 영어가 너무 유창히 흘렀다. 역시, 새벽마다 학원에 다닌 보

람이 있었다.  처음 국제 미팅이 제의 되었을 때, 말하는 건 어떻

게 한다고 해도, 그 쪽 미국남자가 하는 영어를 못 알아 들을까 봐

은근히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가 쉬운 말만 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가 하는 말은 정말 이해가 됐다. 유정도 가끔 그에 맞장구를

치며, 농담도 영어로 할 수가 있었다. 학원비 비싸다고 잔소리

하시던 엄마가 이 광경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 하실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운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따르르르르르르르르....일어나. 안일어나? 좋아, 영어로 해주지.

 웨캅! 웨캅! 유아레잇 웨캅! 허리 압!"

새로 산 방정 맞은 알람시계가 현영을 꿈속에서 뒤 흔들었다. 손

을 더듬어 알람시계를 멈춘 그녀는 다시 침대에 파고든다. 2초 경과.

"아니지. 나 하고의 약속을 지켜야지. 정신 차리자! 황유정! "

벌떡 일어난 유정은 책을 챙겨 들고 워크맨을 집어 가방에 넣는다.

"후후, 영어로 꿈을 다 꾸다니. 강사 말이 맞네."

영어학원 강사가 이제 꿈에서도 영어가 나올 거라고 하더니, 정말

영어 꿈을 꾸고 말았다. 현영이 피식 웃으며 방문을 살짝 닫는다. 

집안 식구들이 깰까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서는데 안방문이 빼꼼이

열린다. 엄마다.

 

"벌써 나가니? 뭘 좀 먹어야지. 그냥 가니?"

"더 주무셔요. 학원 앞에 가면 햄버거 집 많아요. 영어 배우는데 먹

 는 것도 미국식으로 해야죠." 엄마에게 윙크를 하고 집을 나왔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거리의 대다수 사람들의 귀에는 이어폰이 끼어져 있다. 이른 새벽부

터 학원엘 가는 행렬이다. 유정도  배울 곳을 펼쳐 들었다.

"뚜두두두두두두~ 곧 열차가 도착하겠으니...."

유정은 사람들과 뒤섞여 전동차에 올랐다.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영

자신문을 펼쳤다. 유정이 맨먼저 보는 란은 COMIC CARTOON 이다.

 

신문보다 남들의 눈을 더 의식하는 유정은 누군가 계속 자기를 응시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너머로 살짝 살펴 본 유정은 심장이

멎을것만 같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었다.

키는 180이 넘어 보였고, 늘씬한 다리, 하얗고 말간 피부, 그리고 태

평양을 닮은 검푸른 눈동자. 금발의 짧은 머리칼을 가진 그는! 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유정은 머리끝부터 시작한 전율이 온몸을 거

쳐 발끝에 이르기 까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가 살짝 웃는 것 같았

. 유정은 금새 발그레한 홍조를 띄고 영자신문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릿 속에 급행열차가 지나가고 이내 가슴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타고

산산조각내기를 수십 번을 한 후에야 다시 그를 확인하려 눈을 들었다.

 

내리려는 듯 선반에서 가방을 꺼낸다. 그의 목적역은 유정이 다니는

학원보다 한 정거 전이었다.

''영어 강사일까? 유학생? 뭐 하는 사람일까?''

가벼운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 학원을 선택할 때 지금 다니는 학원과

바로 디카프리오가 내린 역에 위치한 학원 둘을 갈팡질팡했었다. 그때

결정을 달리했었다면 디카프리오와 함께 내릴 수 있었을 텐데...애꿎은

전철 손잡이를 주먹으로 팡팡 때리는 유정의 가슴에는 디카프리오와

어쩌면 매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었다.

 

"유정! 오늘은 졸리지 않니? 아주 열심히 듣더라. 질문도 하고."

한 클라스에서 공부하며 친해진 미리가 자판기 커피를 누르며 말했다.

"야. 나 어제 영어 꿈 꿨어."

"어머, 그래? 호호~ 너 영어 확 늘겠다?"

"후후."

미리로부터 커피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다. 그들 앞으로 웬 늘씬한

여자가 남자 영어강사와 함께 담소하며 지나간다. 물론 유창한 영어로.

(저 여자 누군지 아니?)

(?)

미리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미리의 눈은 그 늘씬한 미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여자 너 몰라?)

(누군데?)

(저 여자 원래는 우리처럼 학원 수강생이었대. 영어 무지 못했다드라?

 그런데 지금 저 영어강사와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는 엄청 늘었다는거야.

 지금은 영어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니까 학원에서 상담교사로 일하는데,

 역시, 외국어를 빨리 배우려면 그 나라 사람하고 연애를 해야 하나 봐~)

(그래?)

미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정의 머리 속에 아침에 본 디카프리오가 떠

올랐다. 그와 친해질 수만 있다면 이까짓 영어쯤은 미리보다, 아니, 저 늘

씬하고 멋있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자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유정은 남은 커피를 홀짝 빨아마시고 왠지 즐거운 생각에 영어공부가 저

절로 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유정은 애써 어제와 비슷한 시간을 맞춰 전철역으로 향했다.

''그를 볼 수 있을까? 이번에 보면 정말 내 존재를 확실히 알려줘야지.''

전동차가 도착하고 어제 탔던 맨 앞칸으로 오르는데, 누군가 낯설지 않은

사람이 유정 옆을 지나 먼저 탄다. 그였다. 어제 그 디카프리오가 한 동네

살고 있었다니! 묘한 흥분으로 유정은 머리칼이 쭈삣쭈삣했다. 그리고 반

가왔다. 유정은 그가 기대 선 운전 칸의 벽에 나란히 기댔다. 이제는 작전

대로 책을 그의 발밑으로 떨어뜨리면 된다. 그는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나먼 타국에서 혼자 다니는걸 보면, 혼자 여행하기를 좋아하거

, 지금 너무나 외로움을 많이 느낄 것이다. 유정이 친구가 되어 준다면

누이좋고 매부좋고, 유정은 영어 공부를 공짜로 할 수 있고, 그 또한 한국

친구, 그것도 이쁘고 착한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 매력에 반할지도 몰라.''

유정은 디카프리오가 혹시나 자기를 이성으로 좋아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

각을 했다. 유정도 디카프리오가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눈빛을 보

, 성격도 무난할 것 같았다.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담겨있고, 가슴이 넓

은 걸로 보아 필시, 고국에 미모의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왜 혼자 이국 땅에 있을까? 어쩌면 그 여자친구와 사이가 안 좋아져서

혼자 머리도 식힐 겸 한국이라는 조용한 동방의 나라를 찾은 지도 모른다.

새벽에는 영어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행을 다니는 걸

것이다. 그는 분명히 한국이 너무 좋아질 것이고, 눌러 살고 싶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처럼 접근하기 좋은 기회가 없다.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는 그는 유정을 이성으로 볼 것이고, 결혼을 하자고 할 수도 있다.

 

! 그러면 어쩌나! 유정의 부모님은 보통 평범한 집안에 시집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국제 결혼을 하겠다고 하나밖에 없는 딸이

선언을 해 버린다면, 졸도를 하지 않으실까? 그러면 그를 포기해야 하나?

유정은 사랑을 택할 것이다. 도망을 쳐서라도 디카프리오와 결혼을 할 것이

. 세월이 흐르고 인형 같은 외손주를 안겨드리면 용서 해 주시겠지.

유정은 이제 디카프리오와 친해지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문제가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디카프리오의 발 위로 영어 교재를

떨어뜨렸다.

"툭!"

"어머! 어머머! 아임 쏘리~"

디카프리오가 긴 허리를 굽혀 유정의 책을 집어 들었다. 미소를 띄고 유정의

손에 책을 건네주었다. 유정은 계획이 별 무리없이 진행됨에 화이팅을 외치

고 두 번 째 작전으로 들어갔다.

 

"웰... 땡큐 쏘마치. 아이 워나 바이 썸 커피 유노? 에...아이 월 바이 포 유

 에에...그러니까 비카우즈 땡큐 포 유 에에...픽 마이북...업 에,앤드"

유정은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 온 긴긴 문장을 되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차 올랐다. 어떻게든 의사를 전달하면 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한국말로 하셔요."

"!"

그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전혀 어색한 발음 없이 너무나도 토종

처럼 말하고 있었다. 유정은 챙피해졌으나, 디카프리오를 친구로 얻기 위해선

그 정도 챙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머, 한국말 잘 하시네요. 한국에 오신지 오래 되었나봐요?"

그는 조용히 웃으며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슬쩍 보니 요즘 한창 베스트셀러

가 되어있는 한국작가의 책이었다. 그렇다면, 교환학생? 아니면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어머, 한국어도 잘 하시나봐요? 저는 영어가 안돼서 걱정인데."

"저도 못해요."

그가 유정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네? 못하다뇨? 아이 농담두.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저 한국 사람이여요. 혼혈이죠. 엄마가 한국사람. 아버지가 미국사람.

 내가 영어 잘하는 줄 알았어요? 미안하지만, 난, 영어 아예 못해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다 인데. 영어권 외국인인줄 알고 접근한건가...."

유정은 "아,네, 아뇨..저..그게."를 연발하며 빨리 그가 내릴 정거장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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